Epub은 한자의 덧말 쓰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 PDF 파일을 새로 만들었다. <한비자>를 이해하는 데에, 특히 한자 읽기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한다.
진시황과 한비자
사마천(司馬遷)은 유명한 《사기(史記)》의 <노자(老子) 한비열전(韓非列傳)>에서 한비자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公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 학문을 황로(黃老 : 莊子와 老子)의 학설에 귀착시켰다. 한비자는 말더듬이여서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글은 잘 썼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 荀子)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기의 재주가 한비자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비자는 고국인 한(韓)나라가 땅은 깎이고 국력은 쇠약해 가는 것을 보고 한나라 왕에게 자주 글을 올려 진언했지만, 왕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한비자는 한나라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법제(法制)를 분명하게 하고 왕의 권세로서 신하를 제어하며, 나라를 부(富)하게 하여 군대를 강하게 훈련하고, 인재를 구하여 현인(賢人)을 임용해야 하는데도, 경박하고 탐욕스럽게 나라를 좀먹어 들어가는 벌레 같은 인간들을 오히려 공로가 있는 사람보다 높이 등용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유학자(儒學者)들은 글로써 법률을 어지럽히고 협자(俠者)들은 무력으로 금령(禁令)을 범하고 있었다. 지배자들은 평소에는 그 유학자들과 협자들을 존중하면서도 긴급할 때는 갑옷을 입은 군인들을 사용했다. 지금 나라에서 양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긴급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긴급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은 평소에 기용되지 못한 채 버림받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한비자는, 강직한 선비들이 사악한 신하들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
그러한 한비자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난(說難)’에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진(秦)나라에서 설득에 실패하고 살해되는 바람에 자기가 말한 위험에서 그 자신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한비자가 지은 책을 진(秦)나라에 전했다. 훗날 진시황(秦始皇)이 된 진왕(秦王)은 ‘고분(孤憤)’ ‘오두(五蠹)’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아아, 이 글을 쓴 사람을 만나 교분을 맺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러자 이사(李斯)가 말했다.
“이 글은 한비자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진왕은 한비자를 만나기 위해 즉시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한(韓)나라 왕은 그때까지 한비자(韓非子)를 등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긴급한 사태가 벌어지자 한비자를 사신으로 기용하여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왕은 한비자를 만나 기뻐했으나 충분히 마음이 통할 정도까지는 사귀지 못했다.
서평
한비자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난(說難)’에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진(秦)나라에서 설득에 실패하고 살해되는 바람에 자기가 말한 위험에서 그 자신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한비자가 지은 책을 진(秦)나라에 전했다. 훗날 진시황(秦始皇)이 된 진왕(秦王)은 ‘고분(孤憤)’ ‘오두(五蠹)’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아아, 이 글을 쓴 사람을 만나 교분을 맺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한비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글을 써서 자기의 의견을 왕에게 전달했는데, 그의 글은 너무 날카로웠다.
한비의 이 글들을 모은 것이 곧 <한비자(韓非子)> 55편이다. 사람 이름이 그대로 저서의 이름이 된 것이다.
한비자의 사상의 핵심은 법(法)과 술(術)이다.
한비자는 상앙이 주장한 ‘법(法)’과 신불해가 주장한 ‘술(術)’을 종합하여 ‘법술(法術)’ 이론을 완성하고 이것을 국가 통치의 근본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한비자가 말하는 법이란 법령(法令)을 말한다.
‘법이란 문서로 만들어 관청에 두고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다…. 법은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세난(說難)>
그리고 한비자는 법이야말로 모든 백성이 지켜야 할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했다.
<한비자>는 모두 20권 5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55편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처럼 10만여 어(語)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0만여 어에 달하는 <한비자>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비자>의 분량과 같다.
<한비자> 55편은 그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주장을 직접 기술한 논문체와 문답체의 문장들이고, 다른 하나는 설화와 고사를 인용한 문장들이다. 양적(量的)으로 이 두 가지의 배율은 거의 비슷하다.
이 책에는 춘추전국시대 말기 한비자(韓非子)가 그린 중국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진시황이 통일국가 정치의 원리로 삼았던 이 책의 내용 중에는 통솔하는 지혜, 결단을 내리는 지혜,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 설득하는 지혜, 실리를 얻는 지혜, 사랑하는 지혜, 욕망을 다스리는 지혜, 변전 무쌍한 세객들의 외교술(장의, 소진, 인상여, 순우곤) 등 중국 현자들의 경세철학(經世哲學)과 중원 천지를 뒤흔든 영웅들의 사자후(獅子吼)도 있다.
놀랍게도 한비자가 그 먼 옛날에 그린 일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그중에는 난세에 살아남아 승리자가 되는 방법도 들어있다.
따라서 이 책이 경쟁 시대에 살아가는 당신의 새로운 무기를 연마하고 개발하는 데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비자(韓非子 BC280?~BC233)
중국의 법가, 철학자
전국시대 한(韓)나라에서 태어남
법(法), 술(術), 세(勢)의 대가
한비자(韓非子)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전국시대(BC475~221)의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한비자는 유가(儒家)인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순자를 저버리고 그 당시 봉건 체계가 붕괴하는 상황과 더 밀접한 이론을 가진 다른 학파를 따랐다.
자신의 충고가 한왕(韓王)에게 무시당하자, 한비자는 자기의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 없었기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반론에 대한 논박도 글로 썼다.
BC221년 통일 후 시황제(始皇帝)가 된 당시의 진왕(秦王) 정(政)은 한비자의 글을 읽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진왕(秦王) 정(政 : 훗날의 秦始皇)은 한비자의 전제 정부에 관한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BC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이를 통일 국가의 정치 원리로 삼았다.
BC234년 진(秦)은 한(韓)을 공격했고, 한왕(韓王)은 한비자(韓非子)를 진에 협상자로 파견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진의 승상이자 이전에 한비자와 같이 스승 순자(荀子) 밑에서 공부한 이사(李斯)는 한비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났기에 왕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한비자가 이심(二心)을 가졌다고 모함하여 그를 투옥했다.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그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했다.
한비자는 정치제도란 반드시 역사적 상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유가(儒家)처럼 낡은 제도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이 어떻든, 또 그가 어떻게 다스리든 상관없이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이에 대한 절대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가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름을 따라 <한비자(韓非子)>로 명명된 그의 저서는 당시 법가 이론의 총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