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0 0 0 2 0 3개월전 0

오뇌의 무도

《오뇌의 무도(懊腦―舞蹈)》는 1921년 펴낸 김억의 번역 시집이다. 특히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으로, 주로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수록하였다. 수록된 작품은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작품 9편, 사맹의 작품 7편, 예이츠의 작품 7편, 그리고 〈오뇌의 무도곡〉 23편으로 이루어졌다. 총 168면. 광익서관(廣益書錧) 발행으로 초판은 1921년 3월 20일, 재판은 1923년 8월에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인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시집이기도 하다. 김유방(金惟邦)의 장정에 장도빈(張道斌),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의 서문과 역자 자신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 그리고 김유방의 서시가 그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1918년부..
《오뇌의 무도(懊腦―舞蹈)》는 1921년 펴낸 김억의 번역 시집이다. 특히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으로, 주로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수록하였다.
수록된 작품은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작품 9편, 사맹의 작품 7편, 예이츠의 작품 7편, 그리고 〈오뇌의 무도곡〉 23편으로 이루어졌다.
총 168면. 광익서관(廣益書錧) 발행으로 초판은 1921년 3월 20일, 재판은 1923년 8월에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인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시집이기도 하다.
김유방(金惟邦)의 장정에 장도빈(張道斌),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의 서문과 역자 자신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글, 그리고 김유방의 서시가 그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김억이 <태서문예신보> <창조> <폐허> 등의 지면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번역 시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번역 대본은 세계어(에스페란토) 역본이며, 이 밖에도 영어와 일어를 주로 참고하고 불어도 힘닿는 한 참고하였다고 역자 자신이 밝히고 있다.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가을의 따님」 등 10편, 사맹의 「반주(伴奏)」 등 8편, 보들레르의 「죽음의 즐거움」 등 7편, 예이츠의 「꿈」 등 6편, 기타 시인의 작품으로 「오뇌의 무도곡」 속에 23편, 「소곡(小曲)」에 10편 등 총 8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재판본에서는 일부 시인의 작품이 삭제되거나 추가되어 초판보다 약 10편이 더 많은 9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같은 작품인데도 끊임없는 퇴고 과정을 거쳐 적지 않게 변모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모두 김억의 철저한 리듬 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억은 역시에서 원시가 지닌 리듬에는 미치지 못해도, 가능한 한계까지 한국어의 리듬을 살려보려고 섬세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오뇌의 무도』가 우리 근대 시에 미친 영향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남선(崔南善)으로부터 끊임없이 모색되어온 한국 자유시의 형태가 이들 김억의 번역 시를 통하여 자리잡힌 것을 우선 들어야 할 것이다. 또 베를렌의 「작시론(Art poetique)」의 번역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의 경전(經典)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가늘고 여리고, 애달프고 서러운 감각은 권태, 절망, 고뇌를 거쳐 나타나는 병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1920년대 전기 우리 시의 체질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인다.
김억(金億, 1896년 11월 30일 ~ ?)
시인. 호는 안서(岸曙), 본관은 경주, 초명은 김희권(金熙權),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불린다. 필명으로는 안서, 안서생(岸曙生), A.S. 석천(石泉), 돌샘 등을 썼다.
1896년 평안북도 곽산 출생.
1907년 정주군 오산학교에 입학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 시작.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 〈진달래꽃〉을 쓴 시인 김소월을 제자로 지도하였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고,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하였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 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 번역과 민요 발굴 등 전통적 정서로 관심을 돌렸다.
1930년대 말, 예명 김포몽(金浦夢)으로 대중가요 작사.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고, 생소한 예명을 쓴 이유는, 문단에서의 위치가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인 만큼 남달라서라고 추정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을 담은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의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있음이 밝혀졌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1950년 9월 10일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 협동농장에 강제로 이주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재조명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유페이퍼 대표 이병훈 | 316-86-00520 | 통신판매 2017-서울강남-00994 서울 강남구 학동로2길19, 2층 (논현동,세일빌딩) 02-577-6002 help@upaper.kr 개인정보책임 : 이선희